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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순]너의 세상으로(Flower)






권순영의 아버지와 이석민의 어머니가 법적으로 재혼 가정을 이루게 된 후 2년 뒤에, 일터에서 일하던 중년의 남자는 사고사로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중년의 여자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다. 따라 적당한 평수의 집에서 권순영과 이석민은, 더 이상 이복형제가 아닌 동거인으로 남겨진다. 


이석민은 어머니에게 사랑받았고 이석민 또한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러던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른 세상을 마주한다. 여권도, 차비도 없이. 자신이 갇혀버리게 될 그 세상으로 이석민은 내던져진다.


이석민은 불안하다. 권순영이 자기를 떠날까 봐. 이석민은 갈구한다. 권순영의 존재가 자신의 살에 고스란히 닿는 것을. 그래서 이석민은, 권순영에게 집착한다. 집착은 아주 위태한 형태로 살갗을 뚫고 나와 몸을 습하게 뒤덮는다. 그러니 축축하고 그늘진 어둑함이 밀려 들어와 붉은 꽃은 만개하라.

 

권순영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석민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울었을 때, 혼자 남은 것은 비단 이석민뿐만이 아니었으므로.



/



순영이 밖에서 일을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자신의 침대 구석에서 이불을 끌어모아 다 숨기지도 못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인영을 보게 된다. 순영은 영문 모른 채, 캄캄한 어둠에 잡아 먹힌 그를 따라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침대 한 편에 앉아 소리를 낸다. 


……석민아.


이름은 숨 죽어있는 짙은 갈색의 머리칼을 단숨에 천장을 향해 고개 들도록 만들었다. 퍼석한 머리칼 아래로 물기가 스며든 먹구름 속 눈이 순영을 선명하게 찾아냈다. 지체할 것 없이 팔을 뻗고 다리를 움직여 순영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듯 파고들었다. 그는 차분한 손길로 엉망으로 구겨진 이불을 걷어내고 다시금 먹구름을 끌어당겨 감싸 안는다. 벅찰 만큼 단단하게 허리를 감아오는 넓은 등을 손 안에 넣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달래는 순영은 그대로 먹구름을 맞는다. 

 

밤이 깊었어, 석민아. 자야지. 응?


미동 없이 흘러가던 회색의 구름 위로 순영이 그와 같은 색의 이불을 덮으며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건조한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헤집듯 쓰다듬자 움츠리는 먹구름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순영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석민아. 소리가 밑으로 잔잔하게 퍼져도 먹구름은 요동이 없다. 잠이 든다는 전제는 고사하고 이런 불편한 자세가 더 지속되다간 한껏 움츠러든 모양새에 힘이 들 거란 생각에 순영은 몸을 움직였다. 마른 등 위를 머물던 손을 거둬 제 허리와, 계속 닿아있겠다는 듯 그 몸을 꽉 옭아매고 있는 먹구름 사이로 팔을 비집어 넣었다. 엉덩이를 일으키고 침대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며 힘을 주어 그의 상체를 위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출렁이는 침대 시트 위로 눕히며 그 옆자리로 순영이 혹여 자신이 먹구름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곧장 눕는 것이다. 캄캄한 공간에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길을 느끼며 순영도 짙은 색의 머리칼을 찾아 다시 제 품으로 끌어당긴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보이지 않는 확연한 암흑에서 찰나의 순간 저에게 젖은 얼굴이 스치게 될까 봐. 흠뻑 슬픔에 잠긴 먹구름은 이미 젖어 있더라도,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자신도 젖어 들어갈 만큼 먹구름을 한 품 가득 끌어안는 것뿐이므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성질 탓에 기어코 푸르스름한 새벽을 보고 나서야 감긴 눈을 다시 떴을 때 방 안은 탁한 회색빛이었다. 눈을 내리깔면 석민은 제 가슴팍에 고요한 숨을 주며 자고 있었다. 등허리와 머리칼을 토닥이고 쓰다듬던 손이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석민이 잠에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이 뒤늦게 머리에 들어찼다. 씻지도 못했을뿐더러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로 잠에 들었다. 일단 씻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허리에 감겨있던 석민의 팔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비스듬히 세워진 몸은 석민이 뒤척이진 않는지 확인한다. 날씨가 흐렸다. 


정오 때 즈음에는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석민의 점심으로 챙길 죽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온 순영은 거실로 들어서면서 석민과 마주친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석민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 말문을 뱉은 순영이 일어났어? 묻는다. 죽이 담긴 쇼핑백을 식탁에 두지 못 하고 그대로 손에 든 채 석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쇼핑백은 소파 앞 목제 테이블 위로 올려진다. 석민의 뺨을 슬며시 쓸며 다시 한번 순영의 물음이 일었다. 죽 사 왔는데, 지금 먹을래? 밥 먹어야지. 석민은 멍하니 응시했다. 순영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와 익숙하게 들려오는 느린 발걸음, 검은 머리칼과 제게로 걸어오는 다리, 피부 위로 닿아오는 열기 가득한 손, 자신을 보며 움직이는 작은 입술과 다정한 물음, 그의 전부. 순영을 올려다보던 석민은 응? 석민아, 하며 되물어오는 순영에 겨우 입을 연다. 순영이 형.


순영이 형….


순영, 형…. 석민은 계속해서 소리 내어 이름 불렀다. 순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배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린아이 같은 석민의 모습에 순영은 어제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말없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석민의 상실감은 클까. 아니, 상실의 감정은 이제야, 이렇게 늦게서야 석민을 괴롭힐 텐데. 여린 아이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많이 아플 텐데. 생각에 잠겼던 순영은 들려오는 석민의 목소리에 몸을 낮춘다. 응? 석민아, 뭐라고? …알았어.


꿈인 줄 알았어. 꿈인 줄 알고, 나, 근데…, 그랬는데, 형이 없어서…. 일어났는데, 형이 없어, 서….


형이 없어서, 그래서…. 몸을 낮추었던 순영이 결국 소파 위로 앉으면 잔뜩 얼룩진 먹구름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리고 눈물이 많은 아이라, 퍽 쉽게 다정한 눈물을 흘리곤 했다. 4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마지막까지 울던 이석민과 그의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표정 없이 가만히 서 있던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려 했던 것도 이석민이었고. 매년 아버지의 기일에 기어코 눈물짓던 그 두 눈도. 아이의 하나뿐인 어머니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 순간들을 눈물로 담던 붉어진 그 눈시울, 모두.


나 여기 있어. 지금 네 앞에 있어, 석민아.


방울방울 잔뜩 얼룩진 이석민 앞에, 쏟아져 내릴 비를 오롯이 받을 사람은 나 하나였다. 피할 수도 없이 빠르게 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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