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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순]이유

-바쁘니​​

​말해 뭐 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곧바로 답장이 올거란 생각도 하지 않고 보낸 메시지였는데
​녀석이 읽고는 답장을 보내왔다.

​-아뇨
​-왜요?

안 바쁘기는, 퍽이나.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을 놀렸다.

-그냥
-별 일은 아니고
-너 지금 집에 있는게 좋을 것 같아서

순전히 녀석을 이유로 핸드폰을 집어 든 거였지만 굳이 괜한 일을 만들어 낸 거기도 했다. 답장 대신 전화가 걸려왔다.

-형, 무슨 일이에요. 순영이 형.
"별 일 아니라니까. 늦게 와?"
-지금 갈게요. 빨리 갈 테니까 나랑 계속 통화해요. 응? 저녁은 먹었어요?
"오긴 어딜 와. 아무 일 없으니까 일 해. 나 네 방에서 자고 있을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별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반짝이며 날이 선 것으로 팔이나 허벅지, 가슴께 어디든지에 상처를 내 붉은 선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왔고
그것에 잠식되는 상황은 피해야 했다. 사실 잠식되어 완전히 잡아 먹혀도 상관없다. 별 일 아니지만 녀석은 싫어하니까. 그래서 그 지긋한 갈망을 참아야 하는게 내겐 큰일일 것이다.

녀석의 방으로 가 침대에 누웠다. 생각해 보면 이 방의 책상 위 연필꽂이나 서랍 어딘가엔 커터 칼이나 교체용 칼 심, 혹은 가위같이, 이를테면 내 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물건들이 있고 그게 위험을 초래하는 뜻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 자의든 타의든 내 몸에 거즈가 붙여지고 붕대가 감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도 않는 방에서, 한참 동안혹은 고작 10여 분조차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니 현관문이 열리고 애 타는듯이, 그리고 간절하게 내 이름을 내뱉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이게 짬밥도 안 되는 주제에 땡땡이네. 고개를 돌려 문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너는 침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이내 내 팔을 잡아 끌어 나를 안는다.

"형. 순영이 형."
"아무 일 없다고 말 했는데, 이 바보가 진짜."
"응. 다행이에요. 다행이야, 진짜…."

녀석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고,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베고 살기 위해 흐르는 피를 봐야 했지만 녀석이 울고 화를 내며 두 다리가 무너질 만큼 싫어하는 까닭에 숨을 막아야 했다.
사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저 몸에 상처가 또 하나 생기는 거에 지나치는 일일 텐데. 그것마저도 녀석을 이유로, 내가 살고 죽기 위함이 아니라 너의 존재를 이유로 내가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으니 그에 응하기 위한 것이란 걸 너는 왜 모르니, 아이야.

"나 괜찮아. 너도 왔잖아."
"응. 나 여기 있어, 순영아."

네가 있어 살아가

그래서

네가 있어 죽어가고 있어

그래도 우린 서로 사랑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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